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마스 복음서 (문단 편집) ==== 하나된 자 ==== "나이 먹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 그리고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도:4) 라는 문장과,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도:22) 에서 나오는 "하나된 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려면 우선, '바리새인'[* 간단하게 말하면, 율법과 형식에 엄격했던 유대교 종파 사람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바리새라는 명칭은, 히브리어의 페루쉼(perushim), 아람어의 페리샤야(perishayya'), 헬라어의 파리사이오이(Pharisaioi)에서 유래하고, 파-루슈(parush)의 복수형으로서 "'''분리된 자들, 분리주의자, 구별된 자'''"를 뜻한다. 여기서 '분리되고 구별된 것'은, 바리새인의 엄격한 가르침(율법)으로 인해 '형식'과 '그 본래의 속뜻'이 분리된 것을 말하며,[* 사전에는 "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불결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해 나온 무리"로써 '분리된 자'를 뜻하는 바리새인을 말하고 있으나, 토마스복음에서의 바리새인이란 '형식에 집착해서 그 가르침이 진짜로 가르키는 본 뜻을 잃어버렸다'는 맥락으로 많이 쓰인다. (토마스 39장과 토마스 43장 참조)]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 본래의 속뜻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너희는 유대사람들처럼 되어버렸도다. 그들은 나무(가르침)를 사랑하지만 그것의 열매(삶의 풍요로움)는 증오하며, 열매를 사랑하지만 그 나무는 증오하기 때문이다. " (도:43) 라고 말했던 것. 또한 토마스 61장을 보면, 「 "하나가 온전(whole)하면, 하나는 빛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요. 그러나 하나가 나뉘어지면(divided), 하나는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리라." 」라고 말했는데, 이는 나뉘어진 것(divided)에 상대되는 말로써 '하나의 온전함(whole)'을 이야기 하였으며, 토마스 72장에서도, 「 "남자여! 나를 나누는 자(divider)로 만들었는가? 그는 몸을 돌려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나누는 자(divider)가 아니로다. 그렇지 않은가? " 」 라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예수는 '나누는 자'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복음에서의 예수는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형식보다는 마음을, 가식보다는 솔직함을,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 중요시 하였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하나된 자"의 뜻은, 바리새인으로 통하는 형식적, 물질적, 외면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위선과 가식을 떨쳐버리고 내면의 온전한 삶의 가치에 집중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는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바리새인(분리된 자)의 형식주의를 반대하므로써, 아이와 같이 계산하지 않고 가식과 위선이 없는 "하나된 자"를 말했던 것인셈.[* 이 가르침이 불교의 공사상과 비슷할 뿐이다.] [* 어떤 사람은 또다른 외경인 《토마스행전》에서 토마스가 인도로 갔기 때문에 《토마스복음》이 인도의 사상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결론적으로 틀린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토마스복음》에서 예수는 강자와 부자의 권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소작농과 하인을 부리는 지주와 상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토마스행전》에서 '''예수는 토마스를 노예로 여겨서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아버린다.''' 《토마스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토마스행전》의 예수는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또한 《토마스행전》은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 형식으로 한사람이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첨삭되지 않고 비교적 후대에 작성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최근 신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 《토마스복음》과는 다르게 《토마스행전》은 기존 복음서와도 그 이야기 서사구조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후대의 위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토마스행전》에서는 예수에 의해 인도상인에게 팔린 토마스가, 마침내 인도에 가서 인도왕 마저 개종시키고는, 결국 거기서 순교한다. 그렇다면 《토마스행전》의 토마스는 기존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였던 '의심하는 토마스'"는 아닌셈. (인도에 팔려서 거기서 죽었는데, 그 뒤 예수가 죽었을 때도 12사도 중 한명인 토마스가 나오니까 말이다. 죽은 토마스가 살아나서 예루살렘의 예수를 보러갔을리도 없고,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그런 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 그럼, 이름이 같지만 서로 다른 두명의 토마스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토마스행전》에서는 토마스가 12사도 중 한명이라고 분명히 나온다. 이야기 구조가 애초부터 틀린 셈. 조금만 생각해도 토마스행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는데, 현재 인터넷 상에서는 이렇게 잘못된 《토마스행전》을 가지고 '토마스인도행'을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